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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식의 대가들은 미래의 밥상을 생각하고 있다.
‘한식 세계화’는 이명박 정부의 핵심 사업 중 하나였다. 1000억여원을 쏟아부으며 2017년까지 한식을 세계 5대 음식으로 육성하겠다고 선언했다. 2017년이면 지난해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목표에 전혀 근접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한식의 주력 상품인 김치와 막걸리 등은 오히려 수출량이 현저히 줄었다. 특히 김치는 수출량보다 수입량이 열 배 이상 늘어난 실정이다. 취임 이듬해 떡볶이를 비빔밥, 불고기 같은 한식의 대표 상품으로 육성하겠다며 호기롭게 개소한 떡볶이연구소도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지만 한식 세계화 사업은 성과가 없었다. 혈세만 줄줄 샜다. 그럼에도 지난 10년간 한식은 전 세계 사람들에게 한 발짝 다가간 것으로 보인다. 물론 한식과 관련한 행사를 열 때마다 수십, 수백억 원에 달하는 국고를 낭비하며 초호화 잔치를 벌인 정부의 전시 행정이 거둔 성과일 리 없다. 오히려 전 세계 시청자들의 관심이 우리 식탁에까지 미치게 만든 한류 드라마와 한식에 과감히 도전장을 낸 해외파 셰프들이 그런 변화를 이끈 주역이었다.
그 시초는 2009년 정식당을 열며 ‘뉴코리안 퀴진’이라는 신조어를 만든 임정식 셰프였다. 미국에 있는 세계적인 요리 학교 CIA를 졸업한 뒤 미국과 스페인의 유명 레스토랑에서 경력을 다진 임 셰프는 돌연 귀국해 한식을 택했다. 임 셰프는 당시로는 무척이나 생소한 차림새를 내놓았는데 이에 관해 ‘한식을 서양식으로 재조합했다’, ‘양식을 한식으로 재해석했다’는 등 엇갈리는 평이 오갔다. 실제로 그가 내놓는 음식은 육안으로는 한식과의 개연성이 떨어져 보이는 가니시가 두드러져 보였지만, 맛을 보는 순간 한식의 실마리가 잡히는 것이었다. 한식과 양식의 가장 큰 차이 중 하나인 상차림도 한 상 차림에서 코스로 과감히 변경했다. 사실 한식을 코스로 내는 일은 궁중 음식 연구가 한복려 선생이 2000년 남북 정상회담 때 처음 선보인 이래 가온과 몇몇 호텔 한식당에서 여러 차례 시도했다. 이때 대부분이 한 상 차림을 구성하는 음식을 순서대로 쪼개 내놓는 수준이었다면 임 셰프는 서양 코스의 형식과 구성을 좀 더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당시 그의 음식은 많은 이들에게 물음표를 안겼지만, 우리에게는 한식을 새로이 보는 기회가 됐고 외국인에게는 자연스럽게 한식을 받아들이게 하는 매개가 됐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한식뿐 아니라 국내 파인다이닝 시장까지 큰 파장을 일으킨 임 셰프가 이렇듯 남다른 행보를 택한 이유는 그리 거창하지 않다. 남들과 같은 길을 걷는 것은 경쟁력이 없다고 판단했고, 국내에서는 한식 재료가 양식 재료에 비해 더 저렴하고 구하기 쉬운 까닭이었다.
정식당이 포문을 연 뉴코리안 퀴진은 다른 셰프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대부분 해외에서 서양 요리를 익힌 젊은 셰프들이었다. 밍글스의 강민구 셰프, 주옥의 신창호 셰프, 반얀트리클럽앤스파서울 페스타다이닝의 강레오 셰프 등이 대표적이다. 강민구, 신창호 셰프의 경우 국내에서 새바람을 일으킨 임정식 셰프의 영향을 받기도 했지만 자국 음식을 기반으로 세계적 명성을 쌓은 일본인 셰프들의 영향도 컸다. 음식을 포함한 자국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데에 국력은 큰 근간이 된다. 일식이 한식보다 훨씬 더 이른 시기에 더 넓게 전파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식을 향한 호의가 저변에 깔려 있는 분위기에서 노부 마쓰히사 같은 스타 셰프가 등장하며 전 세계 사람들은 일식에 열광했다. 이웃 나라 출신의 셰프가 전통 음식을 재해석한 요리로 세계적 명성을 쌓는 과정을 지켜본 국내 셰프들은 당연히 깨우치는 바가 컸을 터. 게다가 강민구, 신창호 셰프처럼 노부 마쓰히사의 레스토랑 노부에서 일을 배우며 이런 경향을 직접 목격한 셰프들의 마음은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노부에서 일한 것이 무엇보다도 사고의 틀을 깨는 값진 경험이 됐다고 입을 모은다. 일식의 틀에 다른 나라의 요리와 기술, 재료를 대입하는 데 거리낌 없던 노부의 과감한 시도가 그들에게 큰 깨달음을 안겨준 셈이다.
한편 강레오 셰프는 임정식, 강민구, 신창호 셰프보다 해외 활동 시기가 다소 앞섰다. 강 셰프는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런던과 두바이를 오가며 활동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당시만 해도 한식은 김치를 제외하고는 베일에 가려진 상태였다. 그는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주방에서 혹독한 인종차별과 함께 맵고 자극적인 음식을 먹는 미개한 사람 취급을 받았다. 세계적 명성의 셰프 피에르 코프만은 처음에 그를 채용하길 거절하며 “한국의 자극적인 음식을 먹고 자란 너에게 요리사로서 가르쳐줄 게 없다”고 했다. 이렇듯 모진 차별 속에서 그는 해외 생활을 하는 동안 한식을 일체 입에 대지 않기로 결심했고 10년 동안 이를 지켜냈다. 훗날 귀국한 후에도 한동안 한식을 기피했다. 그랬던 그가 뒤늦게 한식 다이닝을 책임지는 수장이 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보다도 한식에 회의적이었던 그가 한식 카드를 꺼낸 배경이 무척 궁금했다.
“10년간 런던과 두바이를 오가며 장 조지, 피에르 가니에르, 피에르 코프만, 고든 램지 등 쟁쟁한 셰프들 아래서 요리를 배웠어요. 전 세계 다이닝 신의 최전선에서 경험을 쌓은 만큼 나만의 요리를 구사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어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그런데 요리를 하면 할수록 조지, 가니에르, 코프만, 램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기분이 들었어요. 나다운 요리를 향한 갈망이 점점 커졌죠. 오랜 고민 끝에 나만의 독창적이면서 창의적인 음식을 표현할 수 있는 길은 내가 먹고 자란 한식밖에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어요. 정말로 큰 깨달음이었죠. 그리하여 한복려 선생님을 찾아가 한식을 차근차근 배우기 시작했어요.” 강 셰프는 한복려 선생에게 7년간 궁중 요리를 사사했다. 20년 넘게 서양의 주방에 섰으며 누구보다 서양 요리를 존중하고 선망했던 그가 한식으로 회귀했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외국의 선진화된 문화를 제아무리 열심히 배우고 몸에 익혀도 뿌리 깊게 박힌 유전자와 정체성은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어쩌면 더 많은 셰프들이 한식으로 시선을 돌릴지도 모른다.
임 셰프가 명명한 뉴코리안 퀴진은 모던 한식, 컨템퍼러리 한식, 누벨 한식 등 다양한 수식어를 낳으며 점차 국내 다이닝 신의 한 분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꼭 한식을 타이틀로 단 셰프가 아니더라도 한식 재료나 조리법을 차용하여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하는 일이 자연스러워졌다. 그럼에도 한편에서는 여전히 이들의 요리가 한식의 범주에 속하는지 여부를 따지는 논쟁이 있다. 이러한 논란을 한 차례 잠재워준 것이 <미쉐린 가이드>였다. 2016년 <미쉐린 가이드>는 한국에 처음 상륙하며 전통 한식은 물론 모던 한식 다이닝의 손을 들어줬다. <미쉐린 가이드>의 별점을 받은 레스토랑 중 절반이 한식에 기반한 레스토랑이었다. 이미 2014년에 정식당이 국내 한식당 중에서 최초로 영국의 미식 전문지 <레스토랑>에서 선정한 ‘아시아 베스트 레스토랑 50’에서 20위를, 2016년 밍글스가 15위를 차지한 바 있다. 하지만 대중적인 인지도와 상징성을 지니는 <미쉐린 가이드> 서울판에서 모던 한식 다이닝들이 별을 받게 된 건 이전보다 한식에 대한 시선이 좀 더 우호적으로 변모하는 계기가 됐다.
그런데 이렇게 견고한 기반을 다져가는 모던 한식에 새로운 복병으로 등장한 이들이 있다. 한식의 대가로 꼽히는 이종국 선생과 조희숙 선생이 그들이다. 나이가 지긋한 두 선생은 대중 앞에 선 역사가 짧을 뿐 요식업계에서 ‘셰프의 스승’으로 오랜 시간 존경받아왔다. 두 선생이 여태껏 대중 앞에 서지 않은 이유는 주로 지체 높은 재벌가의 부름을 받아 그들을 대상으로 요리하고 가르치는 일을 했기 때문이다. <한식대첩> 심사위원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심영순 선생도 카메라 앞에 서기 전까지 재벌가 사이에서 유명한 요리 선생이었다. 이종국 선생은 2015년 말 여의도에 소재한 한식 다이닝 ‘곳간’ 주방을 맡으며 세상에 한 발짝 나왔다. 그리고 2017년 곳간이 <미쉐린 가이드>에서 별 두 개를 받으며 다시 한번 명성을 알린 이종국 선생은 지난 1월 자신의 레스토랑 ‘104’를 열었다.
이 선생이 한식을 배우거나 한식 주방에서 일한 적 없는 이단아 같은 존재라면 조희숙 선생은 한식의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관통한 인물이다. 조 선생은 1983년 서울 세종호텔 한식당에서 일을 시작했다. 지금은 낡은 인상이지만 당시 세종호텔의 한식 뷔페 ‘은하수’의 인기는 대단했다. 세종호텔에서 10년간 경력을 쌓은 조 선생은 다음 10년을 외국계 특급 호텔의 한식 책임자로 보냈다. 조 선생은 한식이 식음료 사업의 핵심이던 한국계 호텔에서 한식의 입지가 미미한 외국계 호텔로 옮기며 한식의 현주소를 통감했다. 그 후 다시 한국계 호텔인 신라호텔 한식당 총책임자로 발탁됐으나 2년 후 신라호텔이 한식 사업을 접으면서 나와야 했다. 당시는 신라호텔뿐 아니라 웨스틴조선호텔도 한식당을 닫았으며 새로 문을 여는 호텔들은 아예 한식당을 배제하던 시기였다. 한식 분야에서 화려한 경력과 남다른 실력을 인정받은 조 선생은 이 선생과 마찬가지로 재벌가로부터 부름 공세를 받았다. 일부 계층과 차원 높은 한식을 배우고자 하는 일부 셰프들에게 요리를 가르치고 그들을 위해 상을 차려온 선생은 지난해 ‘조희숙의 한식공방’을 열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음식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또 지난 1월에는 한식 다이닝 ‘한식공간’의 주방을 맡아 좀 더 다양한 대중에게 자신의 음식을 선보이고 있다.
이들이 대중 앞에 나서기로 결심한 배경에는 공통점이 있다. 인재를 양성할 목적이다. 조 선생은 반평생에 걸쳐 쌓아온 기술을 후진과 공유하기 위해 공방을 운영하고 한식 다이닝의 주방을 도맡았다. 실제로 한식공간의 주방은 그의 제자들로 채워져 있다. 한편 이 선생은 좋은 식재료를 고집하다 보니 수업료가 비싸 특정 계층에게만 교육의 기회가 돌아가는 현실이 안타까워 문턱을 낮출 방법을 강구하는 중이다. 총 3층으로 이뤄진 레스토랑 1층을 4만원대의 단품 메뉴를 내는 공간으로 마련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최근 가까운 지인으로부터 궁중음식연구원에서 입문 코스를 밟았던 경험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요리에 관심이 많아 이런저런 교육과정을 알아보던 중 아무래도 궁중 음식이 한식 중 국가로부터 인증을 받은 분야라는 생각에 궁중음식연구원을 택했다고 했다. 그런데 칼과 도마 등 기본적인 조리 도구를 다루는 법부터 체계적으로 가르친다는 소개와 달리 수업은 다소 실망스러웠다고 한다. 엄격하고 체계적인 교육을 기대했으나 생각보다 허술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입문 과정을 수료한 후 나카무라 아카데미 입문반에 다시 지원했다. 나카무라 아카데미는 일본 나카무라 조리제과전문학교의 서울 분교다. 지인은 그곳에서 훨씬 더 체계적으로 요리의 원리와 기본 기술을 익혔다고 한다. 오늘날의 한식을 견인한 건 특출한 몇몇 셰프였다. 생각해보면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전문화된 교육 체계를 갖추고 더 많은 후학을 양성할 수 있다면 한식이 더 넓고 더 깊숙하게 해외에 진출하는 계기를 만들 수 있다는 건 자명한 일이다. 은둔하던 한식 고수들이 양지로 나와 보이는 활약상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건 그래서다. 한식을 배우고자 하는 외국인 셰프와 요리학도들에게 눈대중으로만 가르치는 건 더 이상 못할 노릇 아니겠는가.
출처 {에디터 : 민용준, 글 : 이주연(미식 칼럼니스트), 사진 : 정우영, "대가들의 한식", <에스콰이어 - TASTE>}'Food'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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